동양 문화권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해에 해당하는 열두 간지(干支), 띠를 부여 받게 됩니다. 쥐(子)로 시작해 소(丑), 호랑이(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원숭이(申), 닭(酉), 개(戌)로 이어져 돼지(亥)로 끝나는 이 열두 띠에 해당하는 동물들은 동양 문화권의 사람들이 모두 친숙하게 여기는 동물들입니다. 역사서들은 물론이고 구전되고 있는 각종 민담, 설화, 전설 등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농가나 동물원에서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잠깐. 여러분은 용을 그림책, 만화책,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이 아닌 실제 농가나 동물원에서 본 적이 있나요? 각종 동물들이 등장하는 민화와 구전되는 설화 속에서, 용은 호랑이와 짝을 지어 자주 등장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용호문배도(龍虎門排圖)’라 하여 정월 초하루에 대문 한 짝 위에는 호랑이 그림을, 다른 한 짝 위에는 용 그림을 붙이는 풍속이 유행했고, 그림 대신 용(龍)자와 호(虎)자를 종이에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 이야기 속에서 용은 용신이나 용왕으로, 호랑이는 산신으로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호랑이와 같이 실재하는 동물과 짝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인식 속에서 용이 호랑이의 존재만큼 이나 실재하는 동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용의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다른 외형적 특색과 능력, 나이 등을 지닌 응룡 (應龍), 촉룡 (燭龍), 저파룡 (猪婆龍), 훼룡 (?龍), 교룡 (蛟龍), 규룡 (?龍), 용어 (龍魚) 외에도 색깔로 분류된 황룡, 청룡, 적룡, 백룡, 현룡도 있습니다. *** 우리 조상들은 무지하고 과학적 사고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의 동물인 용을 실존한다고 여겼던 걸까요? 그보다는 용이 워낙 오랜 세월 동안 한국 문화뿐 아니라, 더 큰 범위의 동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함께해 왔기에 친숙하게 여겨 분명 상상의 동물이지만 어디엔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동물로 자리잡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열두 간지를 이루는 실재하는 동물들 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상상의 동물이지만 용은 실재하는 동물 못지않은 큰 존재감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그 모습 또한 그리는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머리는 낙타 같고 뿔은 사슴 같고, 눈은 토끼 같고, 귀는 소와 같으며, 목은 뱀과 같고, 배는 신과 같고, 비늘은 잉어와 같고, 발톱은 매와 같으며 발바닥은 범과 같다. 그리고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어 9·9의 양수를 갖추었으며 그의 소리는 구리판을 때리는 것 같고 입가에는 수염이 있으며 턱 밑에는 구슬이 달리고, 목 아래에는 거슬 비늘이 있으며 머리에는 박산이 있는데 이는 척목이라고도 한다. 용에게 이 척목이 없으면 하늘에 오를 수 없다. 기운을 토하면 구름이 된다
.**** 물론 <본초강목>에 나오는 위와 같은 묘사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작가, 지역에 따라 용은 조금씩 다른 모습들을 하고 그림 속에 나타납니다. 민화들을 살펴 보면, 무서운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여의주를 붙잡으려는 용, 기운이 다 빠진 실망한 사람의 얼굴을 한 용, 구름에 휘감겨 신비롭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 등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듯 하면서도 조금은 다르게, 용은 지금 현대 미술의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12 임진년(壬辰年)을 맞이하면서, 긴 역사를 이어 끊임없이 등장하는 용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이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아홉 동물의 형상이 조합되어 만들어졌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당당한 권위를 지닌 용. 물을 관장하고 왕권을 상징하는 위엄을 지닌 상상의 동물 용이 과연 옛 명성을 현대 미술 속에서 어떻게 펼치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현대 미술 작가 14인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그들의 작품 속에서 용은 달항아리에 새겨진 모습으로, 어떤 이의 팔뚝의 문신으로, 굴비같이 동아줄에 매달린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모여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들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많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어도 용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지니는 힘, 신령하고 위엄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고 크고 작게 작품들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부터 용꿈을 꾸면 과거에 급제하거나 크게 이름이 나는 등 경사가 날 징조라 했습니다. 작품들 속 재미있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다양한 용의 모습들을 마음에 담아가시고, 임진년 한 해에도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학교에 웃음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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