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작가가 아니다. - 롤랑 바르트. 현대미술은 관람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모인 8인의 작가들은 최소한의 조형언어를 사용하여 고요한 침묵 속에 작품을 바라보게 이끕니다. 텅 빈 화면, 작가의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거나, 때로는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과 같은 비대상(比對象)적 형상들은 선, 색, 캔버스 자체의 형태에 주목하게 합니다.
서정적, 기하학적 요소의 진지한 실험을 담은 이 작품들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전달합니다. 칼로 종이를 자르는 반복성, 그것을 붙여나가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특징적인 김완의 작업에는 선불교(禪佛敎)적인 수행의 의미가 존재합니다. 장숙경도 동양화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자연에서 추출된 추상적인 모티프를 소재로 사유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윤종주는 테라코타가 섞인 안료를 사용하여 백자토와 같은 인상을 주는 유려한 작품들을 만듭니다.
기호학적인 의미가 숨겨진 추상의 흐름도 보입니다. 류현욱은 기억의 파편을 은유적인 코드로 숨겨둡니다. 세기말의 신인상주의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선의 패턴이 이루는 특정 형상보다는 물감을 뿌리고 스크래치를 가하면서, 자신을 비우고 슬픔을 치환하는 작업 자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차규선은 흙을 매체로 즉시적인 우연에서 비롯된 자연 형상을 구현합니다. 아트월의 중앙계단에 전시될 설산은 자연의 근본 심상을 연구하는 작가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하학적 요소의 실험을 이어가는 작가들은 보다 비묘사적, 객관적 성향으로 분류됩니다. ‘내 그림의 형태가 바로 내용이다.’라는 미니멀리스트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의 말처럼 정은주의 작품은 부조의 입체감을 보이면서 오브제로 존재합니다. 단색 캔버스들이 수직, 수평으로 결합되고, 공간과 만나는 모서리의 지점에서 공명이 전해집니다. 한무창은 대담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다채로운 색채의 선을 콜라주처럼 화면에 그려갑니다. 박옥이의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겹겹의 물감 층이 보이는 기하학적이고 단단한 형태감을 지닌 작업입니다.
세기를 거치며 추상과 재현 사이의 구별이 점차 소멸되어 온 것은 차치하고라도, 서구의 미니멀리즘 종말과는 달리 국내 단색, 추상 기조의 작품들은 80년대 이후에도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움의 미학, 본질에 대한 사유가 사조의 근간을 이룹니다. 비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릇이 비어 있어야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는 노자(老子)의 격언과 같이 비움의 미학으로 공명을 전달하려는 미술가들은 자신의 눈뿐 아니라 영혼도 끊임없이 수련해야 할런지 모릅니다. 이 전시로 비물질적인 색채의 향연, 비움과 열림의 미학에 동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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