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는 원숭이로서의 삶을 포기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똑똑하고 멋들어진 결단이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제 뱃속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왜냐면 원숭이는 배로 생각하니까요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프란츠 카프카
<호기심 상자 속 원숭이>는 인간 vs 원숭이의 이분법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현대미술을 담은 “원숭이의 방”을 충실히 연출하고자 하였다.
인간만 지닌 고유성 중에서도 예술은 가장 독보적인 것이다. 언어라는 고도의 추상적 개념의 체계마저도 생존 및 유전자의 확산을 위한 생물학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는 반면 예술은 오스카 와일드가 “모든 예술은 무용하다”고 말한 것처럼 근본적으로는 유용성의 배제를 전제로 탄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 속의 구애의 기능, 프로파간다적 특성, 장식성, 때로의 환금성 등을 생각하면 미술의 사용가치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용한 주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예술이 잉여로부터 탄생하여 합리성과 효율의 논리를 초월한 차원의 심미적 가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독보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숭이 등의 고지능 동물이 인간의 기준에서 예술에 준하는 행위를 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데즈먼드모리스는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 이면에 있는 힘을 탐구하고, 침팬지가 질서와 균형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한 시도로써 두마리의 침팬지 콩고와 벳시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침팬지들이 그린 그림은 런던의 근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으며, 동물이 그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평론가들에 의해 호평을 받기도 하였고, 대중에게 판매되기도 했다. 물론 유인원의 예술 행위과 인간의 예술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인간의 간섭이 없는 야생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콩고와 벳시가 작품이 완성된 후 붓과 연필을 쥐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그림이 완성되는 시점을 스스로 판단했던 것은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보여지는 피동적 대상으로서의 원숭이와 작품에 대해 판단하는 능동적 주체가 전복이 된 시점이 바로 그 때이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침팬지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원숭이는 신기한 것, 이국적인 것, 인간과 닮았지만 결코 인간에 미치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인간성을 가장 많이 담은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도 원숭이는 각별한 감흥을 선사해왔다. 16명의 참여 작가는 타인과의 소통을 꾀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고통을 공유하는 아바타로서, 인간성을 감추는 가면으로서, 나아가 예술가를 상징하는 도상 등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다양한 매체와 관점에서 대상을 다루기에 본 전시는 근대의 관념적인 체계 이전의, 미분화되어 분류와 상하위의 관계가 없는 나열의 상태에서 작품이 보여지기를 바랬다. 따라서 매체나 주제의 통일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비미술품인 원숭이 오브제 컬렉션과 캐비넷을 병치하여 원숭이로 가득 찬 호기심의 방을 연출하였다. 원숭이의 모습을 빌어 인간의 내면을 비추기를 희망하는 여정에 잠시 동참하시기를 바란다. 신세계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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