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는 이들은 피사체의 정체가 모호할 때 제목을 보고 대상을 유추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정진의 사진에서 이 모든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물론 무엇을 찍었는지 알 수 있는 대상들이 있지만 그 정체를 확인하려는 순간 제목은 기대를 저버립니다. 그저 ‘사물/것Thing’으로 이름 지어진 사진들에서 개별 대상의 이름은 지워져 있습니다.
<THING> 연작은 주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사물들을 크게 확대한 흑백 사진입니다. 작가는 한지 위에 감광유제Liquid Light를 도포하여 사진을 만드는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하여 제작한 풍경 및 정물 사진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아왔습니다. 크고 흰 한지 위에 그림자도 없이 공간을 부유하는 듯 보이는 흑백의 사물들은 평소에는 익숙한 나머지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것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초현실주의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는 <THING>의 오브제들은 녹슬고 구부러진 못, 볼품 없는 작은 토기 항아리, 찢어진 나무 잎사귀, 흠집 난 숟가락, 바스러질 듯 말라버린 나무줄기 등입니다. 이 사물들을 수식하는 공통된 말은 “낡은, 오래 된, 쓸모 없는, 버려진, 볼품 없는, 중요치 않은” 등 입니다. 외딴 집, 창고, 묘지, 섬, 노인, 실루엣 혹은 그늘, 사막, 탑, 불상, 바다 등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가의 여타 작업들을 보면 열거된 수식어들이 이정진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한편 이정진의 사진은 회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인화지로 사용할 한지를 현상액에 담그는 대신 한지 위에 붓으로 유제를 도포하는 수공적 인화의 과정을 거치며 사진의 톤을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에 따르면, 한지는 일반 인화지보다 훨씬 회화적인 질감과 틀을 얻기 쉽고, 형태나 크기 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뿐 아니라 이미지와 소통하는 작가 주관의 전달에 더 효과적입니다. 한지를 구성하는 섬유질의 독특한 질감과 사진으로 찍힌 사물들의 표면을 구성하는 디테일이 중첩되면서 이정진의 작품은 사진에서 보기 힘든 회화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전달합니다. 한지에 작업하기 시작한 1989년경 이정진은 뉴욕에 있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며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등 거장 사진가들과 만나던 무렵, 그는 지난 10년 간의 사진 작업을 원점에서부터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잘 짜인 화면 구성이나 안정적인 구도, 매끈거리는 인화지부터 작가적인 태도까지 그 모든 것을 반추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품을 인화할 매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실험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가장 적절한 것으로 한지를 선택하였습니다. 한지는 이정진 작품의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매우 적합한 매체였습니다. 한지 인화는 작가의 촬영 소재들과 톤이나 질감 면에서 잘 어우러지고 깊이를 더하는 만족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한국 작가 최초로 그의 작품 두 점이 소장되는데, 이 작품들 또한 한지로 작업한 초기 사진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가로로 제작된 <THING> 연작과 달리 한지에 세로로 인화된 사진들로, 화면 아래를 비워 흰 여백을 담담히 보여줍니다. 작가는 인화지가 주는 딱딱한 직사각의 프레임 대신 한지의 불규칙한 가장자리를 그대로 노출하고 여백을 의도적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동양의 수묵화에서 아무 것도 없는 흰 여백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처럼 이정진의 사진에서 여백은 보는 이를 동양적인 비움의 미감과 철학적 사색의 공간으로 이끕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객관적인 기록이자 현존의 증거라면 이정진의 사진은 사진을 찍을 당시 작가의 정신 상태에 대한 기록이자 증거입니다.
따라서 고유명사가 아닌 추상명사가 된 사물의 이름을 따져 묻기 보다 작가와 혼연일체 된 작품 자체와 조응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못이 못이 아닐 때까지, 숟가락이 더 이상 숟가락이 아닐 때까지 작품을 주시하며 기다려보길 권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작가의 손을 통해 한 편의 詩로 거듭난 사물의 세계를 보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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