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의 여정 “나는 항상 신비한 빛의 환상 속에 있다. 그 빛은 환상이라기보다 내게는 오히려 하나뿐인 현실이며, 나는 그로 인하여 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작품들은 그저 망연히 내 앞에 펼쳐있는 그 무상한 공간에 도달하려는 집념의 표상들이며 순간순간 도달한 나의 분신들이다.” - 하동철 작가노트 중에서 - 하동철은 평생 ‘빛’이라는 주제로 작업한 작가입니다. 비물질적 대상의 표현에 화가로서의 삶을 바친 한국 현대추상미술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1986년 한국작가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초대되는 등 다양한 장르에서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 전성기의 작품을 포함하여 원숙한 후기까지, 여러 매체적 특성에 적절히 녹아 든 작품세계의 원형을 엿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신세계로서는 특별히,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인 1979년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 소개되었던 작품을 37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의미 있는 전시입니다. 30대 후반 전도양양 했던 한 작가의 이후 활동을 자랑스러우면서도 아쉬운 마음으로 같은 자리에서 되돌아 살펴보려 합니다. 하동철에게 빛은 어린 시절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보았던 빛, 학질을 앓으면서 본 태양의 빛,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꽃상여의 빛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합니다. 미시적 세계에서 출발한 그의 빛은 동기와 계기를 특정하기 힘든 여러 경로를 통해 확장되었습니다. 그에게 빛은 단순한 물리현상으로서 색의 스펙트럼이 아니며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창이자 고리로 작품세계의 모티프와 근원이 되었습니다. 빛은 평화 자유 초월성과 같은 추상적 가치에서 나아가 피안의 절대자와 신앙의 존재로 연결됩니다. 기억의 빛, 마음의 빛, 신념의 빛, 종교적 빛을 평면 위에 구현하기 위한 하동철의 모색은 시간에 따라 조형적 변화의 흐름과 갈래를 펼쳤습니다. 직선을 수직으로 중첩해 빛 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거나, 짧은 선을 수평과 수직으로 반복해서 펼쳐 놓고, 교차하는 어지러운 직선들의 예각이나 둔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합니다. 기하학적 선과 부드러운 선이 합해지기도 하고, 거칠고 자유분방한 모필과 기계적이고 예리한 선들이 교차합니다. 현실에 있지 않을 원색을 중심으로 다양한 중간색이 보여주는 혼돈의 오로라 위에 작가만의 기억과 관념으로 교직된 선들은 그의 이상향, ‘빛’의 세계를 펼쳐줍니다. 하동철은 회화뿐만 아니라 드로잉과 탁본에서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했습니다. 판화는 실크스크린, 에칭 등 여러 기법을 두루 사용하여 한국 판화 전성기에 뚜렷한 조형적 성취를 남겼습니다. 활발했던 판화 교육 보급활동은 일천했던 한국 판화의 성장과 부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미국 유학 후 돌아와 교편을 잡은 성신여대와 서울대에 국내 첫 판화학과와 판화전공을 개설하는 데 앞장서는 등 판화장르의 정착과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이 당시 판화가로서 전성기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빛의 여정》은 평생에 걸쳐 ‘빛’이라는 단일한 주제를 탐구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꿈을 찾으려 했던 한 작가의 구도의 과정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스스로는 인간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작품을 통해 빛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보여줬던 하동철의 여정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빛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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