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환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상태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는 주변의 모든 것에서 ‘달마’를 보았다. 존재 하는 모든 것들은 달마가 아닌가? 해서 그의 근작은 그만의 해학적인 달마상이 등장한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오리들도 달마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깨달은 자와 깨닫지 않는 자의 구분이란 모호하고 무의미하다.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것은, 모든 이들은 각자의 고유성으로, 그 완전함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점으로 살피고 판단하고 억측한다. 우리들은 사물과 세계를 볼 때 자신의 선글라스를 끼고 본다. 그것을 벗고 어떠한 선입견 없이 대상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스스로 지닌 편견,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대상을 바라보고 판단을 내린다. 오순환은 부디 그 안경을 벗고 대상을 그대로 인식하기를 권한다. 생각해보면 작가란 잘 보는 자이고 그렇게 잘 보도록 깨닫게 해주는 이들이다. 진정한 주체가 되려는 이들이기도 하다. 우선 오순환은 나를 둘러싼 세계, 모든 존재들을 편견 없이 그대로 바라보고 그 존재의 소중함을 인식하라고 권하고 있다. 모든 존재에 깃든 불성을 바라보고 또한 그들이 결국 달마임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 있고 보이는 어느 것 하나, 모두가 그 자체로 축복이며, 이렇게 축복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불법 아닌 것이 없고, 두두물물 부처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이치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이렇게 놓여 있는 것처럼..”(작가노트)
달마란 특정한 존재의 초상을 그린다기 보다는 가시의 차원을 초월하여 형태보다 그 뜻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니 달마의 그 모습은 선화의 화두처럼 다양하며 백태를 이룬다. 그것은 또한 달마의 자유자재한 법신을 말한다. 결국 달마는 마음이 그린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것을 이른바 ‘관심’이라고 한다. 마음이란 만법의 주체이며 모든 것과 관련이 있으므로, 마음을 살피는 일은 곧 일체를 관찰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오순환은 자기 마음으로 본 달마를 그렸다. 그는 일상에서, 모든 존재에서 달마의 얼굴을 보았다. 불성을 만났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평등하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무한한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것이 도를 닦는 일이고 일상이 도장이고 만물이 부처 아닌 게 없다. 달마 아닌 게 없다.
오순환의 그림은 따스하고 정겹다. 해학적인 도상, 부드럽고 눈부신 색채, 환한 광휘로 가득한 화면, 그 안에 더없이 적조하게 들어와 박힌 대상은 맑고 ‘허정’하다. 그 쓸쓸함이 어딘지 탈속의 느낌을 고양시킨다. 오순환은 몇 가지 도상들을 통해 그만의 선화(혹은 선한 그림)를 그려내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네 전통미술의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에 기반 한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 축으로 하고 간결한 선화, 민화의 놀라운 고졸함을 두루 껴안고 그 안에 자신의 심성, 그리고 동양적 사유를 슬그머니 밀어 넣어 이룬 그림이다. 근작에는 평범한 사람들, 모든 생명체가 달마가 되어 등장한다. 작가는 모든 것에서 달마를, 부처의 모습을 찾았던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결국 부처, 달마가 아니겠느냐는 그의 음성도 들린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무수한 달마를 찾고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극한 정성으로 펴내어 그리고 있다.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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