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지윅WYSIWYG이란 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약자로 사용자가 컴퓨터 상에서 편집 중인 내용을 보이는 그대로 최종결과인 인쇄물 등으로 구현해주기 위해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한 인터페이스를 일컫는다. 널리 보급된 워드프로세서 등이 위지윅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결과물 사이에 수많은 명령어와 코드가 조합된 과정이 존재하지만 모두 인터페이스 내에 압축적으로 감추어져 있기에 사용자는 그 과정을 쉽사리 간과하게 된다. 경현수 회화 특유의 간결한 외양은 위지윅으로 쉽게 완성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물 흐르듯 유려한 곡선은 일필휘지로 그어진 듯한 인상을 주고, 날것으로 뵈는 색조는 시선을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따라서 눈에 닿는 표면이 작가의 아날로그적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회화를 시각적인 상쾌함을 선사하기 위한 표면으로 한정 짓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객의 이해를 친절하게 돕는 표면적 인터페이스의 내부적 구조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길”은 경현수가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한정되기를 경계하고 있기도 한 작업의 원초적인 영감이다. 작가는 자생적 발생에서 연유한 불규칙성과 명백한 의도성이 공존하는 “길”이 만들어내는 선 line의 조형미에 매혹되었음을 밝힌 바가 있다. “나의 시선은 다시 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 길을 따라 선이 하나 생긴다. 조금 조잡하지만…재미있다.” 1927년 경성시의 지도에서 길을 따로 오려내어 입체적인 형태와 구조로 재배치하기도 하고, 종로구의 주요 도로를 해체, 재구성하며 매우 예민한 감각을 동원하여 “길”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펼쳐 놓는다. 그는 길이라는 소재가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이야기 전개적 심상-기억, 여정과도 같은-의 말랑한 감각으로부터는 슬며시 거리 두기를 꾀한다. 경부고속도로, 멜버른 비행장 등의 구체적인 지명을 제목으로 삼고 있음에도 그 원형과 조형적 접점을 찾기 어려움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객관적 조형미를 추구해온 경현수가 애정을 보인 대상은 길의 의미나 이야기적 측면보다는 외려 길을 쪼개고 보태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스러기들 debris이다. 전시의 타이틀이기도 한 debris는 1. 사용하고 남은 쓸모없는 부분, 2. 폐기물 3. 각종 외적 작용 때문에 형성된 다양한 파편 그 자체를 일컫는다. 경현수의 debris는 대상의 “나머지” 속성을 일컫기도 하지만, 특유의 디지털 가공을 통해 화면의 이미지를 얻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평면 회화 시리즈에 이르러 모티프로서의 길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화면의 조형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주력하기 위해 이 방식을 선택 한다. 그는 길에서 데이터를 추출하여 선택, 삭제, 수정, 변형 등의 다각적 디지털 가공을 거친 후 유희적이고 리듬감 넘치는 도안을 얻어낸다. 이 형태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으로, 외계의 것 같은 생경함을 주는 동시에 철저한 심미적 목적으로 계산된 구성과 동세, 리듬감을 지녀 관객이 즉시 공감할 수 있는 전통적 미감을 일깨운다.
위의 과정으로 얻은 심미적 형태를 디지털 데이터라는 속성적 한계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는 빛의 RGB 원색을 CMYK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재현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이 변환은 필연적으로 빛깔 본성의 훼손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데이터의 삼차원화를 이데아적 빛깔의 그림자 재현의 관계로 한정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위지윅"의 편리함 대신 페인팅이라는 고행을 기꺼이 선택한다. 예리하게 모이고 흩어지는 정교한 선과 가볍게 발린듯한 날것의 색감은 실상 철저한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수 겹의 물감칠을 감수하는 장인적 수고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상적인 빨강의 표면을 만들기 위한 아래에 녹색과 흰색의 물감 계층을 얹어 색상 간의 간섭을 이용하는 식이다. 작품을 가장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일상적 거리에서 벗어나 애써 가까이 다가서면 작가가 애정을 들여 쌓아올린 두터운 층을 흔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다.
"빛깔의 톤 차이와 구성, 하나가 미세하게 틀어지면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믿음이 경현수가 "나머지"와 나머지가 아닌 것의 존재를 구현하는 데에 집요한 정성을 쏟아붓는 까닭일 것이다. 매끈한 표면 아래에 쌓여있는 작가의 치열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경현수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호흡해보시기를 권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