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란 사전적 의미로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는 뜻을 가지며, 경제용어로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를 말한다. 이처럼 노동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행하는 부수적인 행위이기에, 우리는 이 노동을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해야 하는 무엇으로 인식하곤 한다. 실제로 현대인의 대다수는 일하는 시간 동안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이후에 무엇을 할지, 일해서 번 돈으로 무엇을 살지, 어디를 놀러 갈지 고민하곤 한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것이 태초부터 그랬을까?
19세기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1845)라는 글에서 그는 노동이 고대에는 일종의 놀이였음을 밝히고,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분업화가 시작되고 그 결과로 노동이 고역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공예가이면서 정치, 사회 등의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n Morris, 1834~1896)도 엥겔스와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모리스는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등과 함께 미술공예운동(Art and Craft Movement)를 이끌며, 노동과 놀이가 일치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런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추진되었던 다양한 시도들은 이미 작동되고 있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노동과 놀이가 다시 합쳐지는 일은 없었으며, 사람들은 계속 노동을 힘들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권용주와 이정형은 다소 맹랑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예술과 노동’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작품을 선보인다. 권용주는 광주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두산아트센터, 아트스페이스풀 등 굵직한 전시와 기관들에 초대되어 전시를 하면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전시디자이너 겸 작품설치 및 철수하는 ‘인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권용주는 작품활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 ‘부업’을 작가로서 숨겨야 하는가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숨기기보다 오히려 작품으로 소화해냈는데,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 <만능벽>(2014)이 그것이다. 마치 박람회장이나 백화점 쇼윈도에서 상품을 소개하는 방식과 같이 회전하는 원형판 위에 자신이 전시장에 세우던 벽체를 올려놓아 선보이는 이 작품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해 하는 부수적으로 행한 부업, 즉 노동을 본업인 예술작품으로 변용시키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교란시킨 작품이다. 이정형도 권용주와 같은 맥락의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이다. 이정형 역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대미술관 등의 전시에 참여하며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권용주와 같이 전시디자이너 겸 설치 ‘업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서 권용주는 노동을 예술로 환원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고 했는데, 그 외에도 다른 맥락의 작품들도 제작해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석부작>(2016), <Casting>(2018)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정형은 권용주와 다르게 지금까지는 ‘예술과 노동’을 테마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 설치를 하며 나온 각종 쓰레기 등 부산물들을 작품으로 바꿔 버린 <현장 콜렉션>(2016)과 페인터(painter)라고 불리는 두 직종, 즉 ‘화가’와 ‘도장공’의 차이는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며 제작된 <페인터>(2015)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두 작가 모두 무엇을 얻기 위해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부수적으로만 취급 받던 노동을 그 자체로 예술작품, 더 나아가 일종의 상품으로 만들어 내면서 현재의 시스템에 교란을 가져오고 혼란을 자아낸다.
전시, 《전시 중입니다》는 전시를 설치하며 나오는 부산물들이 전시되고, 또 전시를 설치하는 과정 자체가 작품으로 승화되어서 얼핏 전시 같지 않게 느껴질 수 있기에 지어진 전시제목이다. 하지만 동시에 전시에 수반되는 ‘노동’ 그 자체를 전시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제목이기도 하다. 이 전시는 새하얀 공간 안에 깔끔하게 마무리된 작품들에 익숙한 관람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도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엄연히 예술계가 용인한 예술이다. 이번 전시를 감상하며 새로운 형식의 전시가 주는 생경함과 더불어 우리가 미처 잘 생각해보지 못하는 노동의 이면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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